소설은 줌파 라히리가 수년간 거주했던 로마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로마는 유적으로 가득한 도시다. 두터운 역사로 쌓아 올린 곳에서도 생생한 ‘지금’의 삶이 펼쳐지고 있듯이, 소설 속 인물들은 태생적으로 지닌 이름, 국적, 성별을 넘어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로마 이야기 도서의 책소개
첫 소설집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던 작가, 줌파 라히리의 4년 만의 신작 소설집이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쓴 이번 작품에는 로마를 배경으로 한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시작으로 『책이 입은 옷』, 소설집 『내가 있는 곳』 등을 이탈리아어로 썼던 줌파 라히리는, 『로마 이야기』를 통해 이탈리아어에 대한 더욱 깊어진 이해와 함께 그동안 천착해온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인도계 미국인 작가 줌파 라히리에게 이방인이라는 감각은 소설의 중심 테마였다. 그는 첫 소설집인 『축복받은 집』에서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느끼는 미묘한 불안을 그려왔다. 『로마 이야기』에서도 이방인성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며, 특히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쓰며 정체성을 발명했던 경험은 이방인성에 대한 풍부한 통찰로 이어진다. 줌파 라히리는 『로마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날 때부터 주어진 정체성이란 유동적이며, 인간은 모두 불가해한 세계를 떠도는 이방인이라고 묘사한다.
저자 줌파 라히리 소개
1967년 영국 런던의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곧 미국으로 이민하여 로드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 바너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보스턴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같은 대학에서 르네상스 문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첫 소설집 『축복받은 집』을 출간하며 그해 오헨리문학상과 펜/헤밍웨이상을,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003년 출간한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은 ‘뉴요커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로 뽑혔고 전미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2008년 출간한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은 프랭크오코너 국제단편소설상을 수상했고 〈뉴욕타임스〉 선정 ‘2008년 최우수 도서 10’에 들었다. 2013년 두 번째 장편소설 『저지대』를 출간했다. 가족과 함께 로마에서 거주했던 경험을 계기로 이탈리아어로 쓴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책이 입은 옷』, 소설집 『내가 있는 곳』 등을 출간했다. 프린스턴대학교를 거쳐 현재 바너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미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생활 중이다.
발췌문
P. 30 그들은 더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 몇 가지를, 잊었는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겨두고 떠났고 나는 그 물건들을 보관한다. 소녀들이 그린 그림, 해변에서 모은 조개껍데기, 몇 방을 남은 향긋한 바디워시. 소녀들의 어머니가 두고 간 수첩에는 작고 흐릿한 필체의 쇼핑 목록, 그리고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 있다. P. 41 어쨌든 세상에 많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그리고 천천히 밝혀질 비밀과 발견 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이 도시에 사는 것이 참 좋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P. 50 그들은 내가 속한 그룹과 너무나 달랐다. 즉 로마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걱정스러운 로마의 쇠퇴를 한탄하면서도 절대 로마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달랐다. 서른 살에 단순히 사는 동네를 바꾸고, 새로운 약국에 가고, 새로운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고, 새로운 바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이 하나의 출발, 하나의 큰 움직임, 하나의 일탈을 의미하는 사람들과 말이다. P. 69~70 나는 아들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을까 봐, 아들이 속으로 슬퍼하고 있을까 봐, 어떤 곤란한 문제에 휘말렸을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미숙하고 연약한 이는 내 아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내가 실현할 수 없었던 나의 다른 모습, 내가 무시하고 막았던 나의 다른 모습,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패배시켰던 나의 다른 모습이었다. P. 78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이전의 삶을 떠올렸다. 성취할 것이 아직 남은 삶, 우스꽝스러운 삶, 정돈된 삶, 화려한 삶. 나는 내숭 떨지 않고 춤추는 여인들, 자신을 잘 관리하는 여인들을 가만히 관찰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젊지 않았고, 이제는 균열, 건강 문제, 실망을 가득 안고 있었다. P. 114 지하도는 앞뒤로 거대한 창문이 항상 열려 있는 길고 좁고 큰 건물 같았다. P. 161 형제는 아직 젊었던 아버지, 지금 두 사람보다 더 젊고 호리호리했던 아버지와 공원으로 놀러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던 그 일요일을 조심스럽게 재구성해본다. 그때 형제가 다니던 학교의 또 다른 아버지가 강변을 달리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두 아버지는 계단을 내려가고 올라가며 서로 만났고, 서로를 알아보자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 약속을 잡았다. 형제는 공원에 가려고 서둘렀다. 장례식이 끝난 후 F는 “내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계단에서의 짧은 대화를 통해 두 남자는 아직 어떻게, 언제일지는 알지 못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은 명확히 깨달았다. P. 187 나는 해가 지고 해변에 있는 사람들의 피부가 똑같이 황금빛을 띨 때까지 그곳에 머문다. P. 261 길을 가고, 갈망하고, 결정을 내리다 보면 반짝이는 기억 혹은 깨우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생겨난다. 그러나 오늘 대성당에서는 숨겨진 기억이 지배한다. 그 기억이 바위 아래에서 기다린다. 기억을 들추면 생생히 살아 있고 불안한 나 자신의 조각들이 펄쩍 뛰어오른다. P. 279 살아남는 법을 배우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 몇 번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여자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다. 광장 위로 밝은 하늘이 펼쳐진다. “참 엿같은 도시야.” 우리 중 한 명이 침묵을 깨고 말한다.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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